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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 '하느님의 종 125위' (2013-04-30)
    평화신문  작성일 2013.12.30  조회 1578     
<4> 신유박해 순교자(경기도)- 최창주 등 11위 / 양인성 선임연구원 (한국교회사연구소)








   하느님의 종 125위 가운데 신유박해 순교자는 53위다. 1791년 진산사건에서 비롯돼 1888년 윤봉문(요셉) 순교에 이르기까지 98년간 박해로 피를 흘린 순교자들 가운데 시복시성 대상이 된 하느님의 종 125위 중 42.4%에 이른다. 하느님의 종 125위 중 병인박해(1866년) 때 19위, 기해박해(1839년) 때 18위, 을해박해(1815년) 때 12위에 비하면, 신유박해 순교자가 얼마나 많은지 금세 알 수 있다.

 신유박해의 배경은 두 가지다. 사회적으로 천주교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로 인식됐다는 점, 그리고 천주교 평등사상이 양반 중심 신분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비쳐졌다는 점이다. 특히 천주교가 만연할 경우 백련교도의 난 같은 민란이 일어날 개연성이 크다는 우려도 컸다. 또 채제공과 신서파(信西派)를 후원하던 정조가 1800년 6월(음력) 죽자 노론과 공서파(攻西派)가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내세워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자 한 것도 박해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이같은 이유로 벌어진 신유박해 순교자 가운데 경기도 출신 순교자는 15위다. 이 가운데 6위는 한양 서소문 밖 네거리와 포도청에서 순교했기에 경기도에서 죽은 순교자는 9위이고 서울 출신인 홍인과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이 경기도 포천과 남한산성에서 각각 순교함으로써 경기도에서 순교한 신유박해 순교자는 모두 11위다.

 경기 지역 순교자는 근기(近畿), 즉 여이양광(驪利陽廣) 지역 출신 순교자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여주와 이천, 양근, 광주에 신앙이 그만큼 많이 퍼져 있었다는 의미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승정원일기」에 남아 있다. 종조 24년(1800년) 「승정원일기」 신구조 상언(上言)에 따르면, "최근 사학이 삼남에 번성하고, 근기에까지 물들었으니 그 기세를 막을 수 없을까 걱정과 근심이 끝이 없습니다. 여주와 양근으로만 말한다 해도 여주옥에 갇힌 자가 10여 인에 이를 정도로 많다고 하며, 양근에는 그것에 미혹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배우지 않은 마을이 없으니 장차 온 고을이 모두 금수의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경기 지역 순교자 11위 중 경기감영, 즉 현재의 서울 적십자병원 일대에서 1위가 순교했다. 그가 경기도 양근 출신인 조용삼(베드로, ?~1801)이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문하였던 그는 덕행과 열심이 아주 특별했다고 한다. 1800년 부활대축일을 지내고자 여주 정종호의 집에 가 있던 중 이중배(마르티노, 1751?~1801), 원경도(요한, 1774?~1801) 등과 함께 체포돼 경기감영에서 옥사한다.

 경기도 여주에선 5위가 피를 흘렸다. 최창주(마르첼리노, 1749~1801)와 이중배, 원경도, 정순매(바르바라, 1777~1801), 정광수(바르나바, ?~1802) 등이다. 장인과 사위 사이였던 최창주와 원경도는 여주에서 체포돼 경기감영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은 뒤 해읍정법(該邑正法), 곧 죄인이 살았던 지역으로 돌려보내 정법(사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받고 순교한다. 사촌 원경도와 가깝게 지내던 김건순(요사팟)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이중배 또한 해읍정법의 판결에 따라 경기감영에서 여주로 보내져 순교했다. 정광수와 정순매 남매도 신유박해 당시 체포돼 갖은 문초와 형벌을 겪으면서도 뛰어난 용덕을 보여주고 나서 여주에서 참수를 당했다.

 경기도 양근 순교자는 윤유오(야고보, ?~1801)와 윤점혜(아가타, ?~1801), 권상문(세바스티아노, 1769~1801) 등 3위다. 1795년 순교한 교회 밀사 윤유일(바오로)의 동생인 윤유오는 경기도 양주 점들(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을 무대로 활동하다가 체포돼 순교했으며,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회장으로 활동한 윤점혜는 포도청을 거쳐 고향인 양근으로 이송돼 순교했다.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권철신의 양자가 된 권상문은 집안의 신앙을 이었지만 생부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순교하면서 마음이 약해져 교회를 멀리하기도 했으나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참수형을 받았다. 이 밖에 신유박해 순교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아들인 홍인, 윤지충(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던 한덕운도 신유박해 당시 경기도 순교자로 기록되고 있다.

 신유박해는 당시 조선사회나 교회에 미친 영향이 컸다. 물론 신유박해 이전에도 박해가 있었지만 신유박해처럼 대대적으로, 전면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신유박해로 교회는 거의 빈사상태가 됐다.

 그러나 신유박해를 계기로 신앙은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됐다.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산간으로 숨어들었고, 복음은 풀씨처럼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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